거의 2일동안 신들린듯 썼습니다. 죽어라 써내려갔는데 과연 평이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_-;
이 횡설수설 장문 끝가지 다 읽어주시며 교정 보시느라 수고 많으셨던, 본햏의 약간 배나오고 걷는 것 좋아하고 B급 센스로 넘치시는 미식가 뮤즈(...) 오그드루 자하드님께 무한한 감사를.
호황에서 불황으로
Dog Days, 마도카 마기카, 그리고 아노하나
호황기, 도금시대, 그리고 불황기의 감성
이번 시즌을 보다보면 흥미로운 작품들이 여럿 보인다. <Dog Days>,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이하 '아노하나')>, 그리고 어쩌다보니 도호쿠 지진 여파를 직격으로 얻어맞고 이번 시즌까지 질질 끌려나온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이하 '마도카 마기카')>. 각자 한 시대를 대표하는 것들이다. 그래, 이거 필자의 설레발일 수도 있다는 거 잘 안다. 그래도 한 번만 따라와 줬으면 한다. 간만에 쓰는 장문이다.(...)
1. <Dog Days>, 때늦은 말랑말랑한 호황기 감성
츠즈키 마사키(都築真紀)는 트라이앵글 하트 시리즈도 있었지만, 그의 전성기는 2004년부터 2007년까지다. 바로 <마법소녀 리리컬 나노하> 시리즈를 만들던 그 시절. 여기서 독자 여러분께 질문. 여러분은 2004~2007 사이에 나온 애니메이션을 대라면 과연 3분 안에 몇이나 댈 수 있는가? 필자도 사실 끽해봐야 <마이히메>와 <제로의 사역마>, 그리고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정도였다.-_-;
사실 저 시절은 지금보다도 더 많은 물건들이 쏟아져 나오던 시기다. 일본 경제는 나름대로 몸을 추스르는 모습을 보였고, "잃어버린 10년"은 슬슬 지나가는 듯 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일본 역사상 흔치 않은 "극장형 정치"를 선보였다. 우정개혁에 반대한 자민당 의원들에겐 "고이즈미 자객"을 보냈고, 북한에서는 납북자 가족들을 구해왔다. 일본에는 간만에 활기가 도는 듯 했다.
애니메이션 업계에도 새 바람이 불었다. 야마모토 유타카는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에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극한의 캐릭터 작화로 전세계적 영상 충격을 가했고, 이른바 "서비스형 애니"가 잘 팔리면서 로봇물로 유명한 선라이즈조차도 <마이히메> 시리즈로 시작되는 이른바 "모에물" 작품 라인업을 세우기 시작했다(물론 마이히메 시리즈와는 달리 <아이돌마스터 제노글로시아>는 폭싹 망했지만-_-). 호황이 온 것이다.
호황기의 작품들은 밝은 기조가 특징이다. 모든 것이 낙관적이고, 모든 것은 결론적으로는 잘 될 것이다. 적이라도 친구가 될 수 있으며, 주인공들이 죽더라도 다시 살릴 수도 있다. 조금 야시시하면 더 좋고. 미국도 전후 케인즈 호황 시절에는 그랬다. 모든게 잘 될 거야! 뜨거운 것이 좋아!(?)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경제가 살아나는데 뭔 걱정이람! 이런 시대야말로 이른바 "우울한" 작품들의 무덤이다. 사람들은 즐기고 싶어하지, TV 앞에 앉아서 기분을 잡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츠즈키 마사키의 시그니쳐, 세븐 아크스 사의 캐시카우 <리리컬 나노하> 시리즈가 바로 이랬다. 주인공들은 거진 스페이스 오페라 레벨의 마법 포격을 서로에게 뻥뻥 쏴제끼지만, 뭐 괜찮다. "비살상" 마법이라서 사람은 안 죽는다. 다만 배리어 자켓은 찢어져서 속살이 보일 뿐이지. 적은 항상 나타나지만, 포격전을 한번 겨뤄보며 설득하다 보면 결국은 다들 친구가 될 수 있다. 물론 옷들은 좀 찢어져서 속살은 보이지만. 아 그리고 쟤네들 다 초딩이라는 건 그닥 중요치 않슴미다 고갱님들.
<Dog Days>는 2007년 <마법소녀 리리컬 나노하 StrikerS> 이후 잠수했던(극장판 프로젝트는 여기서는 제외한다) 츠즈키의 신 애니메이션 프로젝트다. 츠즈키의 거의 온실 레벨에 가까운 평화주의는 여기서도 그 위명을 떨친다. "전쟁"은 사실상 스포츠 경기화돼서 중계까지 하는 판국이고, 하급 병사들은 타격당하면 동물 인형으로 변하고(!), 상급 장수들은 타격치가 올라가면 장갑이 파괴된다(!!). 장갑파괴 설정 덕택에 서비스신이 난무하고, 성우들도 값비싼 성우들로 전면 포진시켰다(당장 오프닝부터가 이 바닥 최고의 가희 미즈키 나나다-_-). 한마디로 호황기 애니메이션의 때늦은 등장이라 할 수 있겠다. 필자는 자신할 수 있다. 이게 2000년대 중반정도에 나왔더라도 나름대로 뜰 수는 있었을 것이다. 아니, 몇 달 전에만 나왔더라도 나름 팔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늦었다. 좋은 시절은 지나갔으니까.
2. <마도카 마기카>, 도금시대의 불안과 퇴폐, 그리고 광기
이제 호황이 진행되면, 필연적으로 다음 시대가 온다. 바로 도금시대(Gilded Age)다. 이제 호황의 기쁨과 즐거움은 막연한 불안감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빛나던 금박이 벗겨지고 속살이 드러난다. 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파티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며, 그 날이 오면 우리는 모두 정복자 구더기에게 씹혀먹힐 것이다. "불황"이라는 정복자 구더기에게. 이제 퇴폐적 분위기가 시대에 흐르기 시작하며, 퇴폐는 광기를 낳는다. 도금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시기에 오면 일본도 다시 변화한다.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2006년 사임했고, 후임 아베 신조는 1년만인 2007년 불명예스럽게 쫓겨나면서 2009년 민주당 집권시까지 계속 될 총리 퇴임 퍼레이드의 스타트를 끊었다. 경제는 서브프라임 사태를 직격으로 얻어맞고 휘청대기 시작했으며, 사회는 다시 활력을 잃었다. 민주당이 2009년 집권하긴 했지만, "자민당과 민주당의 차이는 카레라이스와 라이스카레의 차이"라는 누군가의 말 처럼 정부는 여전히 비틀댔다. 도금이 벗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도금시대가 되면 사람들은 다양한 부류의 작품을 시도한다. 어떤 이들은 호황 시절 잘 팔리던 물건들의 농도를 높인다. 더 야시시하게. 더 막장으로. 어떤 이들은 우려먹을 것이 떨어지니 예전에 잘 나가던 작품들을 창고서 들고 와 새로 리부트를 시도하기도 한다(물론 감독이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대부분 망한다-_-). 어떤 이들은 냉소와 풍자로 시선을 돌린다. 이도 저도 아니면 기존 작품의 스핀오프를 내던가.
이러한 면에서 <마도카 마기카>는 매우 특이한 작품이다. 특이한 영상미로 이름을 날린 스튜디오 샤프트가 제작을 맡고, 하드보일드적 시나리오로 유명한 우로부치 겐을 시나리오 라이터로 앉혔다. 거기다가 캐릭터 디자이너로는 "치유계"의 대표주자 아오키 우메를 앉혔다. 평시라면 전혀 실현될 가망조차 없던 조합이다. 거기다가 제작진은 우로부치 겐이 시나리오 라이터라는 것을 최소한 3화까지는 숨기려고 했다. 그래, 그 3화-_-.
<마도카 마기카>의 세계는 매우 극단적인 콘트라스트를 보여준다. 사람은 극한까지 작아지고, 배경이 인물을 압도한다. 스탠리 큐브릭 영화가 그렇듯이. 배경의 대비 또한 그렇다. 미타키하라 시는 길거리에서 반도체 생산시설을 가동해도 될 듯한 극한의 정결함과 무기질성으로 시청자를 압도하며, 마녀의 결계는 그와 반대로 바로크적 생동감과 광기가 극대화된다. 캐릭터와 기존의 클리셰들에게는 매서운 공격이 퍼부어진다. 모든 것을 믿을 수 없으며, 시청자의 편집증적 공포 또한 극대화된다. 아르토가 <잔혹연극론>서 말했듯 시청자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을 직격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도카 마기카>의 성공 원인을 논의한다. 떡밥을 잘 던져서, 작품 퀄리티가 좋아서, 우로부치의 네임밸류 때문에, 등등. 하지만 본인의 생각은 이렇다. <마도카 마기카>는 2010년 제작이 발표되었다. 도금시대가 절정을 달리던 때이다. 그리고 그들은 도금시대가 극점에 다다른 그 시간에, 그 시대의 정수를 담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2007년에 <마도카 마기카>가 나왔다면 화제는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화제를 독점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3. <아노하나>, 어부왕을 그리며
"I've sent my brightest and bravest men to search for this. How did you find it?"
"I don't know. I only knew that you were thirsty."
"나는 이걸 찾으려고 내 가장 현명하고 용감한 부하들을 보냈었어. 대체 어떻게 찾은 거지?"
"잘 모르겠습니다. 전 그저 전하께서 목이 마르시단 것만 알고 있었어요."
-테리 길리엄, <The Fisher king(1991)> 中 어부왕과 바보의 대화
켈트족에는 "어부왕(Fisher King) 전설"이라는 것이 있다. 옛날 어느 왕이 있었다. 그는 어느 날 다리, 혹은 어떤 버전에서는 좋지 않은 부위-_-를 다쳐서 그 후로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고, 그의 왕국도 그와 함께 힘을 잃고 황무지가 되었다. 그는 이제 물고기를 잡으며 고통을 잊는다(그래서 어부왕이다). 어느 날 기사 퍼시벌이 지나가면서 그 어부왕을 발견하게 되고, 그는 키워드인 질문("이 성은 누구의 것입니까?)을 제대로 물으면서 왕을 치유하게 된다. 그와 함게 황무지도 다시 번영하는 왕국으로 돌아간다. 이런 류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원래 버전은 조금 다르다. 어떤 점에서 다르냐고? 원래 질문은 "그 그릇은 누구를 접대하기 위한 겁니까?" 혹은 "그 창은 누구의 것입니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퍼시벌은 그 질문을 미루는 바람에 결국 왕과 왕국 모두 사라지게 된다.-_-
도금시대의 말기와 불황시대의 초기를 구분하기란 참 어렵다. 불황은 한번에 닥치는 것이 아니라, 가랑비에 옷 젖듯 조금씩 조금씩 소리 없이 잠식해오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일본의 도금시대는 2011년 초까지도 이어졌다. 민주당이 집권하면서 무언가가 바뀌었다는 인식이 생겨났긴 했지만, 그저 도금시대의 연장일 뿐이지 전혀 새 호황은 오지 않았다. 이제는 일본이 자랑하던 전자산업마저 IT분야의 갈라파고스화로 국제 경쟁력이 처참하게 추락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2011년, 결국 동일본 대지진이 터졌다. 그들이 그토록 자랑하던 "완벽한 시스템, 완벽한 기술"의 신화는 단숨에 깨졌으며, 일본의 모든 병폐가 샅샅히 까발려졌다. 쓰나미는 모든 것을 휩쓸고 폐허와 박살난 원전만을 남겼다. 수도 도쿄로까지 방사능이 날아들었다. 믿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박살난 것이다. 이제 불황이 죽음의 네 기사의 호위를 받으며 도쿄 시내를 행진한다. 지진과 쓰나미에 휩쓸려 죽은 도금시대의 시체 너머로.
불황이 오면 자신들이 쌓아올렸던 것들, 자랑스러워했던 것들은 눈앞에서 송두리째 무너진다. 도금시대엔 그래도 희망이나마 있었지만, 불황이 찾아오면 그런 것도 사라지게 된다. 웃음을 찾아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이들도 있지만, 불황기에는 웃음조차도 자조와 애수가 배어 나온다. 버스터 키튼이 우울한 얼굴로 코미디를 선보이고 찰리 채플린이 언제나 웃음 사이에 가슴에 쏠 따끔한 한 방을 숨겼듯이. 이제 사람들은 각자의 어부왕을 필사적으로 찾기 시작한다. 어떤 이는 IMF 시절 유행하던 오토다케 히로타다의 <오체불만족> 류의 인간승리 드라마에 매달리기도 한다. 다른 이들은 즐거웠던 호황의 나날들, 근심 걱정 없던 아름다웠던 시절들을 향해 처절하게 외친다. 나 다시 돌아갈래! <아노하나>의 스토리라인은 매우 고전적인 클리셰로 이루어져 있다. 생자는 과거에 잘못을 저질렀고, 이제 그 잘못을 고치기 위해 절망하는 생자에게 사자가 강림, 그를 돕는다. <길가메시 서사시> 시절부터 나오던 클리셰다. 초등학교 시절 골목대장이요 "초평화 버스터즈"의 리더였던 야도미 "진땅" 진타는 10년 전 여름, 첫사랑이던 혼마 "멘마" 메이코를 사고로 잃는다. 사고 이후 하나 둘씩 친구들은 "초평화 버스터즈"를 떠났고, 사실상 남은 것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히키코모리가 된 진타 뿐이다. 이제 서먹해진 그들은 각자의 인생을 산다. 그러던 10년 후 어느 여름날, 진타의 눈 앞에 멘마가 다시 나타난다. 성장한 모습으로 나온 그녀는 자신의 소원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하는 것은 하나, "옛 친구들 여섯이 모두 모여야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뿐. 이제 진타는 집 밖으로 나와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멘마의 마지막 소원을 위해, 그리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아노하나>의 감독 나가이 타츠유키는 1976년생이다. 시나리오 라이터 오카다 마리 등 다른 스탭들도 엇비슷한 나이다. 그들이 10년 전 진타의 나이였던 80년대 후반, 일본의 버블은 최고로 치솟아 올랐다. 위대하고도 신성한 엔화만 있다면 서민이라도 꿈에만 그리던 파리, 로마, 뉴욕 어디건 가서 왕이 될 수 있었다. "아버지" 사장님에게 충성만 바친다면 "자식" 샐러리맨들은 몸은 힘들어도 당당히 가장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소니의 워크맨은 세계를 지배했고, 이미 미국의 도로를 정복한 도요타는 렉서스를 런칭하며 럭셔리 시장에까지 도전장을 내밀었다. 잔뜩 겁먹은 미국인들은 도요타를 때려부수고 <라이징 선>을 읽으며 자위했다. 팍스 자포니카(Pax Japonica)의 꿈도 진정 허황된 것은 아닌 듯 했다.
하지만 나가이 감독이 10대 후반이 된 90년대 중반이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클린턴 아래에서 대호황을 맛보며 미국이 다시 살아나는 동안, 일본은 끔찍한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일본인이 믿고 따르던 모든 가치는 하루아침에 쓰레기통에 쳐박혔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자식들"은 놀이터에서 그네나 타거나 아니면 옥상에서 몸을 던지는 신세가 되었다. 가장의 권위가 추락하면서 히키코모리니 오타쿠니 하는 이야기가 전면으로 등장한 것도, (본인도 중증 우울증 환자요 오타쿠였던) 안노 히데아키가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위명을 떨친 것도 바로 이 시기다. 무언가 감이 잡히는 것이 있으신가? <아노하나>의 배경은 2011년이다. 10년 전, "초평화 버스터즈" 시절은? 2001년. 고이즈미 소호황의 시작기이다.
자, 썰이 길었다. 불황기 작품들은 대체로 회고적 경향을 보이곤 한다. 지금은 흘러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름다운 옛날에 대한 회상과 애수, 그리고 회한이 작품 속에서 배어나온다. 진타는 멘마의 소원을 위해 11화 내내 죽자사자 노력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멘마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현실에서 성배는 존재하지 않고, 어부왕이 다시 젊어지는 일 따위는 없듯이 친구들은 변했고, 죽은 사람은 되살아나지 않는다. 하지만 최소 무언가는 나아질 것이다. 진타는 히키코모리 생활서 벗어날 것이고, 지금은 서로 으르렁대고 서먹할 지라도 친구들 사이의 상처도 아물 것이다. 불황기 작품은 언제나 그렇듯 한 갈래 희망을 주곤 하니까. 채플린의 그 독하기 그지없던 <모던 타임즈>도 마지막은 길거리를 걸어가며 한 줄기 희망이나마 보여주었고, <아노하나>는 최소한 <박하사탕>은 아니니까.
4. 마무리 - 호황에서 불황으로, 세상은 돌고 돌고
예술은 작가와 소비자의 주변 상황에 크게 작용한다. <고지라>를 예로 들어보자. 캐슬 브라보 사건이 터지면서, 일본인들 사이에 아직 남아있던 핵공포는 다시 재점화됐고, 토에이는 1954년 <고지라>를 선보였다. 일본인들은 핵으로 집을 잃고 분노하는 이 방사능 돌연변이 공룡의 위용에 떨며 영화관으로 몰려들었고, 그 이후로 <고지라> 시리즈는 토에이의 새로운 돈줄이 된다. 그리고 60년대가 되면서 일본의 호황기가 시작된다. 이제 고지라는 점점 개그 캐릭터화되기 시작한다. 드롭킥을 날리질 않나 괴수어(語)로 다른 괴수랑 대화를 하질 않나(!) 다른 괴수에게 발리지를 않나. 이 사태가 진정된 것은 80년대, 그러니까 도금시대가 도래하고 다시 무지막지하게 강력한 고지라의 이미지가 돌아온 후의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한 시대와 그 시대의 작품들은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 물론 이게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사람의 취향은 가지각색이니까. 하지만 그 시대의 명작으로 남은 것들을 보면 어느 정도 연관은 있다. 호황기라면 밝은 기조의 낙관적인 작품이 유행한다. 사람들은 기분이 좋고 지갑은 빵빵하니까. 호황기가 지속되면 이제 도금시대가 들어오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불안감이 침습한다. 블랙 유머라던가 클리셰를 부수는 류의 어딘가 뒤틀린 작품들이 인기를 끌게 된다. 이제 불황이 오게 되면 사람들은 과거를 애타게 그리워하기 시작한다. 내 지갑은 비었고 몸과 마음은 괴롭다. 이제는 웃음마저도 어딘가 불안하다. 우울한 작품들이 치고 올라오게 된다. 그러다가 이제 호황이 다시 오게 되면 다시 호황기 기조로 리셋하고 다시 시작을 하는 거다.
<아노하나>를 필두로 이번 시즌들은 우울한 작품들이 인정을 받는 기세이다. <C>에서는 사람 수명으로 노름질을 하고(역시나 고전적 클리셰다), <데드맨 원더랜드>에서는 이능력자들이 정부가 만든 감옥 속에서 목숨 걸고 전투(그것도 쇼로서 생중계되는!)를 벌여야 한다. 스튜디오 샤프트의 <전파녀와 청춘남>은 아직까지는 도금시대적 감성을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시대가 바뀌는 것이다.
시대의 변화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을 들자면, 필자는 기간한정 PV로 공개된 아노하나 TVA 엔딩(으로 추정되는) 영상을 꼽겠다. 나가이 감독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흰색 배경화면 아래로 잿빛 꽃들이 빙글빙글 돌며 비처럼 쏟아진다. 10년 전 모습을 한 세 주연급 여주인공들이 우산을 쓰고 꺄꺄거리며 달려간다. 그 모습을 현재 모습의 셋이 지켜본다. 그러다 어느 순간, 화면이 뒤로 쭉 빠진다. 이제 노래의 클라이막스 부분으로 넘어가면서 총천연색으로 꽃비가 바뀌고...꽃비가 위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성배를 발견하고, 어부왕이 치유된 것이다.
...여태까지 읽느라 수고하셨다. 이제 결론을 내도록 하자. 이제 일본 서브컬쳐는 한 사이클을 전부 돌았다. 본인은 일본 불황이 얼마나 갈지는 모른다. 하지만 우리도 모두 알듯이, 불황의 90년대 후반, 일본이 내놓은 것은 <카우보이 비밥>과 <하이바네 연맹>, 그리고 <공각기동대>였다. 앞으로도 일본 서브컬쳐물의 우울함은 한동안 더 나아가면 나아갔지 뒤로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경제가 다시 살아나는 그 날까지. 그래도 한낱 희망을 가져보도록 하자. 결국은 알고 있지 않은가. 멘마는 소원을 이룰 것이고, 진타는 새 삶을 살 것이다. 희망은 올 것이다. IMF 때 인기있던 드라마도 있지 않은가. <파랑새는 있다>고. 마무리로 본인이 좋아하는 노래 가사나 번역하고 끝내련다. 찰리 채플린의 <Smile>이다.
Smile though your heart is aching
Smile even though its breaking
When there are clouds in the sky, you'll get by
If you smile with your fear and sorrow
Smile and maybe tomorrow
You'll find that life is still worthwhile
If you just Light up your face with gladness
Hide every trace of sadness
Although a tear may be ever so near
That's the time you must keep on trying
Smile, what's the use of crying?
You'll find that life is still worthwhile.
가슴이 아플지라도 웃어라
가슴이 부서질지라도 웃어라
하늘에 구름이 있다면, 그대 그럭저럭 살아 나가리
웃는다면 아마 내일 그대 삶이 아직 가치있다는 걸 발견하리
만일 그대 그냥 얼굴을 기쁨으로 밝히고
모든 슬픔의 흔적을 숨기고
만일 눈물이 터지기 직전이라도
그때야말로 계속 시도해야 할 때
웃어라, 울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대 삶이 아직 가치있다는 걸 발견하리라
...희망을 잃지 말자. 불황이 올 때 우리가 의지할 것은 그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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