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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하 X-over] A Byzantine Holiday by 카군


 대체 얼마만에 올리는 소설이던가...


※본 소설은 픽션이며 실제 인물, 단체와는 관계없습니다.

※본 SS를 읽고 생길 수 있는 각종 신체적/정신적/사회적/종교적(?) 트라우마 등 어떠한 상황에 대해서도, 본 작가와 편집진은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일직선 개그 노선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지명 및 인명 표기는 최대한 현대 그리스어 발음을 따랐으나, ‘콘스탄티노플’, ‘아테네’ 등 이미 굳어진 것들은 예외로 했습니다. 경감을 포함한 주인공들은 모두 그리스어 원어민이 아닌 외부인이기 때문입니다.


 
 
 카군 & 오그드루 자하드 공저
 
 For Turtledove





 
늙은이는 단지 하찮은 물건,
막대기 위에 걸린 해진 코트에 불과할 뿐,
만일 영혼이 손뼉 치며 노래하지 않는다면,
보다 큰 소리로 노래하지 않는다면,
또한 그 장엄한 영혼의 기념비들을 탐구하지 않는다면
노래하는 학교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바다를 항해했고,
성스러운 도시 비잔티움으로 왔노라.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비잔티움 항해(Sailing to Byzantium)」 中



 #
 세계력(Έτος Κόσμου) 7522년
 신력 73년, 서력 2013년
 콘스탄티노플, 갈라타 외교단지

 황령은黃鈴銀 중령은 수블라키(꼬치구이)를 물어뜯었다. 콧김을 뿜고, 와그작와그작 씹으면서도 계속 씩씩거렸다. 노점의 숯불화로에서 뿜여내는 연기와 열기까지 겹치면서, 그녀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염병할 색골 돈벌레 자식, 확 폭탄이나 맞고 뒈져버려라!”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타1) 외교단지를 뒤흔들었다. 인적이 드문 탓에 그녀의 목소리는 쩡쩡 울렸다. 땀을 뻘뻘 흘리며 수블라키를 굽던 중늙은이 노점상도 순간 흠칫했다. 근처에서 음식 부스러기를 주워먹던 갈매기들이 푸드덕거리며 날아갔다.

 “야, 그러다가 누가 들으면 어떡하냐.”

 “아무렴 어때, 어차피 방음벽 되어 있잖아. 여기서 백날 떠들어도 못 들을 거라고.”

“진정해라, 마. 이렇게 혈압 올라봤자 너만 손해지.”

 모리스 데물랭 대령은 동기이자 절친한 황 중령을 위로해주려 나왔지만, 그녀의 분노는 사그라들 줄 몰랐다. 알칼리파 회군 사건으로 좌천된 것도 서글픈데 이제는 저 러시아 돼지의 눈요깃감이 되었다 치이는 신세라니! 그 동안 참고 있었지만, 한번 터지자 멈출 수가 없었다. 황 중령의 양 갈래로 묶은 머리칼이 부르르 떨렸다. 목소리가 더 올라갔다.
 
 “아다나에서 비행기 타고 여기까지 날아왔는데, 총지국장이 노크도 안 하냐고 소리지르면서 서류나 놓고 꺼지라는 거야. 아 썩을, 생각하니 또 열 받네- 그럴 거면 팩스로 보내라고 하면 되잖아? 여하간 말이야, 집무실에 들어갔는데 뭔 남자 놈이랑 알미늄 케이스 하나 가지고 만지작대면서 시시덕대더라고. 그러다가 날 보고 펄쩍 뛰는 거야. 총영사도 헐레벌떡 올라가던데 대체 뭘 받은 거지 원.”

 그녀는 총지국에 오는 것이 싫었다. 미드칠더 공군 소속 NATO 파견장교로서 그녀의 임무는 동로마 제국에 주둔한 NATO 부대들과 시공관리국 파견부대들 간 분쟁사항을 조율하는 것이다. 물론 콘스탄티노플 주재 시공관리국 총지국장도 그녀의 상관이지만, 군 관련 사항은 언제나 람슈타인의 시공관리국 공군사령부로 브리핑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위대하신 총지국장께서는 언제나 적어도 1주에 한 번은 직접 자기 사무실로 찾아와 브리핑을 하라고 요구했다. 그것도 황 중령을 콕 찍어서. 아다나의 나토군 기지에서 콘스탄티노플까지의 직선 거리가 근 1,000km에 육박한다는 사실은 아무런 변명거리도 되지 못 했다. 데물랭이 푸 소리를 냈다.

 “금 아냐 금? 그 돼지 같은 놈은 금이라면 사족을 못 쓰니까.”

 그 말을 끝내고 데물랭이 마지막 수블라키 조각을 삼켰다. 그가 지폐를 내밀고 석쇠 위의 새 수블라키를 집어 들었다.

 “아저씨, 수블라키 하나 더 먹을게요. 이거 맛있네. 야, 하나 더 먹을래? 내가 낼게.”

 중령이 한숨지었다.

 “됐슈. 프루사 자이로나 하나 사주면 또 몰라.”

 “비싸잖아. 그리고 ‘자이로’가 아니라 ‘기로스’2)겠지.”

 “알게 뭐야, 모국어도 아-“

 순간, 황 중령의 눈 앞이 번쩍했다. 거의 동시에 몸이 뒤로 부웅 뜨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깜깜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사방이 연기로 뒤덮여 있었다. 뜨겁고 매캐한 공기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소방대원들이 뭐라 소리치며 그녀의 몸을 흔들더니 들것에 실었다. 구급차에 들어가기 직전, 황 중령의 눈에 주변이 들어왔다. 각 대사관들을 둘러싼 거대한 담벼락과 각 국의 국기들, 이곳 저곳에 주차된 외교관 차량들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총지국은 온데간데 없었다. 총지국이 있던 자리에는 시뻘건 불길과 검디 검은 연기뿐이었다.



  #
  세계력 7522년 1월 4일
  신력 73년 9월 4일 11:00

 케말리스 바실레오파토르3) 국제공항에서 출발한 제국 헌병대 헬기는 최고 속도로 날아갔다. 헬기의 창문으로 보이는 광경은 아름다웠다. 도시를 싸고 도는, 짙푸른 프로폰티스 해 위 곳곳에 크고 작은 배들이 떠 있는 풍경은 마치 동화 같았다. 테오도시오스 성벽 바깥의 신시가지에는 마천루가 삐죽삐죽 솟아 있지만, 성벽 안은 청동 지붕 혹은 기와를 씌운 오래된 건물들로 가득하다. 구 시가지는 온통 붉게 보였는데, 콘스탄티노플에 흔한 붉은 흙으로 만든 기와 덕이다.
 토요사키 루이코(豊崎涙子) 중령은 창가에서 고개를 돌렸다. 헬기 소음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갈색 해군 육전대 제복 차림이 평소에는 편했지만, 지금은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옆에서는 쿠와하라 사야코(桑原鞘子) 경사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귀마개로 귀를 막은 채로.

 “그런데 도대체 우리가 왜 동로마까지 와서 사건을 맡아야 하죠?”

 “뭐라고?”

 귀가 먹먹해지는 헬기 소음을 뚫고, 토요사키 중령이 소리쳤다. 건너편 좌석에서 론리 플래닛에 코를 박고 있던 해리 듀이(Harry A. Dewey) 경감이 고개를 들었다. 토요사키가 다시 고함쳤다.

 “왜 콘스탄티노플까지 왔냐고요! 이건 집무총국이나 수사국 사건 아니에요?”

 경감이 낮게 저주를 퍼부었다. 이 망할 헬기 안에서는 목청이 떨어져라 고함을 내질러야 간신히 들린다. 경감이 있는 힘껏 고함쳤다.

 “미드칠더 상공진흥국4) 건물은 우리 미드칠더 소속이니까! 시공관리국 콘스탄티노플 분국 건립 당시에 약정된 사항이야!”

 “이런 빌어먹을- 그거 하나하나까지 다 정한 거에요?”

 “뭐라고? 안 들려! 있다가 이야기 해!”

 지쳤다는 듯 경감이 손사래를 치곤 다시 론리 플래닛을 펴 들었다. 그런 경감을 본 토요사키도 다시 창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우물쭈물대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아직 연방군 해군 육전대 장교였던 시절, 당시 중위였던 토요사키는 3년 전 조사팀의 일원으로 2개월 간의 보안 점검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점검대상은 97세계 내에 산재한 각국 소재 총지국 들이었는데, 당시 현지의 보안실태에 대한 보고서는 A4지로 200매가 너끈히 넘어갔었다. 노르웨이 테러 이후에도 보안태세 재정비 이야기는 나왔지만, 결론은 말 뿐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고도가 낮지?

 원래대로라면 헬기는 벌써 성 디미트리오스 곶5)을 좌로 하고 틀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헬기는 자꾸 고도를 낮추며 구 시가지의 해안 성벽을 끼고 날고 있었다. 토요사키는 안전벨트를 풀고 조종실로 향했다. 조종석 창 밖으로 콘스탄티노플의 풍경이 확 펼쳐졌다. 그녀를 본 조종사가 엔진 소음 너머로 소리쳤다.

 “중령님! 앉아 계십시오! 하강 중이라 서 계시면 위험합니다!”

 손을 내저으며 토요사키가 큰 소리로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뭐라고 하셨습니까?”

 토요사키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어디로 가는 거냔 말이야!”

 그제서야 알아 들었다는 듯 조종사가 역시 목소리를 높이며 답했다.

 “갈라타 미 대사관으로 갑니다!”

 그런데 왜 계속 해안선을 타고 나는 거지? 그녀가 다시 물었다.

 “거긴 반대 방향이잖아! 왜 이 쪽으로 가는 거지?”

 “비행 제한령이 내려져서 콘스탄티노플 시내론 어떤 비행기도 못 들어갑니다! 이것도 간신히 허가를 받은 겁니다! 해안선을 타고 가다가 테오도시오스 성벽이 나오면 그걸 따라 금각만까지 가는 겁니다! 그리고는 갈라타로 들어갈 겁니다!”

 “아니, 갈라타가 코 앞인데 그렇게 돌아서 간다고?”

 “황궁을 거쳐가는 길이라 제일 안전합니다!”

 맙소사. 도시 전체에 비행 제한구역 설정이라니, 진짜 비상사태구나. 토요사키가 속으로 혀를 찼다. 헬기는 이제 대황궁을 우로 하고 지나가고 있었다. 구시가지는 로마 제국의 기억과 기념물들로 가득하다. 콘스탄디노스 기념주, 테오도시오스 기념주, 아우구스타이온 광장, 히포드롬, 대황궁, 그리고 성 소피아 대성당까지. 금각만이 구시가지 옆을 유유하게 흐르고 있다. 로마 제국은 무려 2,000년 동안 존속해 왔다.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로마 제국의 영광은 과거형이지만, 콘스탄티노플에서는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토요사키는 객실로 들어가기 전, 구시가지가 아닌 금각만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목적지, 갈라타였다.



  #
  신력 73년 9월 4일 11:30
  로마 제국 헌병사령부, 4 칼리폴리스6) 광장
  5구, 콘스탄티노플,

 디미트리스 카나리스 (Δημήτρης Κανάρης) 장군의 집무실에서는 2001년 화재 이후 완전히 새로 건립된 해군본부의 청색 유리 전면과 광장 한가운데에 우뚝 선 칼리폴리스 전승기념비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 아래로는 제방과 물결치는 푸른 바다, 그리고 정박해 있는 퇴역 군함들이 보였다. 장군은 집무실 정면을 바라보았다. 부관이 정자세로 꼿꼿이 서 있었고, 대화면 속에서는 요르고스 파판드레우 총리의 커다란 얼굴이 그를 마주보고 있다.

 “별을 단 지가 벌써 24년이네, 요르고스. 난 은퇴할 때가 이미 넘은 사람이야.”

 “10년 전에도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디미트리스 카나리스.”

 화면 너머로 한숨을 쉬는 요르고스 파판드레우(Γιώργος Παπανδρέου) 총리의 말처럼, 이제 자신도 70세가 넘은 카나리스였지만 은퇴는 그의 할아버지가 그랬듯 언제나 말로만 준비하고 있었다. 티마이오스 도릴레오스7 총리가 제안했던 국방장관 직조차 거절했지만 강권에 못 이겨 해군장관만 10년 넘게 지냈던 그의 할아버지처럼, 그 역시 은퇴할 나이를 한참 넘긴 채 현역으로 지내고 있었다. 카나리스 장군이 낮게 기침을 했다.

 “조부님도 이 나이 즈음에 은퇴하셨어.”

 전승기념비와 광장 앞 제방에 정박한 전함 콘스탄디노스 드라가시스 호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옆에는 잠수함 쿠르쿠아스 호도 있으리라. 해군 장교 가문 출신으로서 아침마다 집무실 커튼을 걷을 때마다 그 모습을 보면 만감이 교차했다.
 사모트라케 해전에서 잠수함 쿠르쿠아스 함은 영국군 전함 퀸 빅토리아 함을 비롯해 일곱 척을 침몰시키는 대전과를 올렸다. 그 쿠르쿠아스 함의 함장이 바로 그의 할아버지, 아다만디오스 카나리스 제독이었다. 취기가 돌 때면 노제독은 꼬마 디미트리스에게 무용담을 들려주었다. 어떻게 영국 해군의 눈을 피해 흑해에서 집결했는지, 폭풍우 속 엘리스폰도스8) 해협을 뚫고 나와 무방비 상태로 놓여있던 연합군 함대를 향해 일제사격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발사한 첫 어뢰가 어떻게 퀸 빅토리아 호의 탄약고를 직격, 일격에 굉침(轟沈)시켰는지. 그 때마다 노제독은 에클렉토스 케말리스9)가 직접 준 무공훈장을 흔들어 보이며 자랑하곤 했다. 자랑스러운 업적이었지만, 그 업적은 그를 항시 짓누르고 있었다.

 “젠장할, 내가 어떻게 황제를 껴안고 낙하를 했지? 할아버님이 지금 내 꼴을 보셨음 한바탕 웃다가 정강이를 걷어차실 게야.”

 디미트리스 카나리스가 조부 앞에서 부끄러울 일은 없었다. 콘스탄디노스 15세가 독재 정권에 맞서 트라페준타10)에서 친위 쿠데타를 벌이려다 퇴위까지 몰렸을 때, 디미트리스 카나리스 소령은 제국군 내의 최고 엘리트 부대인 황실 근위연대 엑스큐비토르(ἐξκουβίτορες)11) 1대대장을 맡고 있었다. 햄버거 힐12)에서의 전공 덕택이었다. 카나리스 소령은 낙하산 하나만 덜렁 매고 황제를 껴안고 수송기에서 뛰어내리는 필사의 탈주를 감행, 단신으로 황제를 영국군 군함에 태워 런던에 도착할 때까지 수행하면서 전설이 되었다. 하지만 그 때는 1973년이었고, 그런 ‘공수부대 헤라클레스’도 이제는 노인이었다.

 “어제는 엘리베이터 말고 계단으로 올라왔는데, 기절할 뻔 했어. 예전이면 뛰어 올라가도 땀 하나 안 흘렸을 텐데! 이젠 세워지지도 않는다고!”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시면 되잖습니까. 아니, 그리고 저보다 머리숱도 많으시면서.”

 “누가 머리 숱 적다고 뭐라 했나? 물러날 때가 되었다는 거야.”

 카나리스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파판드레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폐하의 친구 분이시니 뭐 안 될 것도 없기는 하죠. 그러고보니 폐하랑 동갑이시죠?”

 “그렇지. 40년생. 나는 2월, 폐하는 8월.”

 해군에서 복무한다는 황실의 전통과 달리, 황태자 콘스탄디노스는 엉뚱하게도 복무할 부대로 육군 공수부대를 택했다. 그리고 그 때 젊은 콘스탄디노스 팔레올로고스 소위와 함께 임관했던 이가 바로 디미트리스 카나리스 소위였다.

 “곧 손님을 맞으러 나가야 하니, 짧게 하나만 묻지. 요르고스 파판드레우. 이 손님- 그래, 사건을 내게 떠넘긴 이유가 뭐지?”

 화면 너머에서 파판드레우가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갑자기 왜 물으시는 거죠?”

 “이번 건은 우리 측 정보기관이 시공관리국과 합동으로 조사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나? 그러니까 방첩국이라나 대외정보국 쪽에서 말이야. 왜 이게 헌병사령부한테 넘어온 거지?”

 파판드레우가 대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첫번째로, 정보국은 범죄 수사 전문이 아닙니다. 그리고 둘째, 저도, 폐하도 장군을 믿기 때문입니다.”

 “자네 얼버무리는군. 정보국이 이렇게 순순히 테러 사건을 헌병한테 넘긴다고?”

 “중립적이고 무당파적인 기관이 수사를 지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내각의 총의입니다.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황실과 군부의 누군가, 혹은 일부가 이번 일을 권력 투쟁에 이용하려 든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물론 소문일 뿐입니다만.”

 “그리고 방첩국과 대외정보국은 황실과 군부의 손이 제일 깊이 뻗어있지. 그래서 날 골랐다 이건가?”

 “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파파도풀로스의 쿠데타와 전횡을 지켜보면서, 카나리스 장군은 군부 내에서도 가장 열렬한 문민통제 옹호자가 되었다. 현역 내내, 그는 문민통제 원칙을 군부에 뿌리 내리려 했다. 그가 지휘하는 곳 어디에서도 그랬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너무 오랫동안 군국주의 전통을 유지해 왔다. 군에서 정치에 개입하려는 움직임은 늘 있었다. 때로는 간접적으로, 때로는 직접적으로, 드물게 노골적으로. 군의 정치 개입에서 많은 역할이 정보기관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런 못된 인간을 봤나.”

 장군이 외마디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 혼자서 군부와 황실을 막아달라고? 좀 더 젊고 건강한 사람을 찾아봐. 이 친구야, 이 노친네를 고생시켜서 뭘 어쩌려고 그래.”

 “아 그래.”

 순간 파판드레우가 가볍게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장군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총리가 말했다.

 ”폐하께서 이 말씀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당신께는 장군님뿐이라고요.”

 파판드레우, 이 망할 자식. 장군이 속으로 으르렁댔다. 장군에게는 언제나 황제가 아킬레스건이었다. 황제가 그를 믿는다고 하면, 그는 언제나 적에게 달려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파판드레우는 노황제의 기분을 맞춰 이용하는 데에는 천재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은 그냥 넘어가주지. 장군이 화제를 돌렸다.

 “자네, 미국 대사에게 말은 해 봤나? 그 친구 이름이 뭐더라, 그렇지, 매클레인 말야.”

 파판드레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장군, 이건 우리 제국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기껏해야 시공관리국의 문제죠. 러시아인이 죽었는데 미 대사가 무슨 소용입니까?”

 “수상쩍은 음모로 이익을 보려는 누군가가 있다면, 미국이 끼어들어서 일이 너무 커지기를 바라진 않을 거야. 그리고, 미국인이 죽었건 안 죽었건 그 친구들은 뭔가 좀 알고 있지 않겠나? 그리고 매클레인 대사는 테러 전문가야. 한번 물어라도 보게나. 이제 손님들을 맞으러 가야 하니, 나중에 보세.”

 그 말과 함께 장군이 소파에서 노구를 일으켰다. 덩달아 일어나며 파판드레우가 목소리를 높였다.

 “장군!”

 “아직 말이 남았나?”

 “제 질문에 대해선 대답을 안 하셨습니다.”

 “질문?”

 “맡아주실 겁니까?”

 장군이 가볍게 눈을 깜빡였다.

 “폐하께 전하게. 언제나 충성을(Semper Fidelis).”

 장군이 손날로 목을 치는 시늉을 하자, 부관이 곧바로 접속을 끊었다. 카나리스는 눈을 감고 다시 의자에 몸을 묻었다. 이런 짓을 하기엔 난 너무 늙었어. 장군의 눈 앞엔 어느새 카파도키아의 영지가 어른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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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스탄티노플 주재 미합중국 대사관 제2동, 21~26 갈라타 외교복합단지
  13구, 콘스탄티노플, 로마 제국

 갈라타의 시공관리국 콤플렉스의 1/4가 박살이 났다. 콘스탄티노플 미 대사관의 텅 빈 옛 미국 문화원이 비상대책본부가 되었고, 그곳이 임시 총지국 노릇을 하게 될 것이다. 성조기 옆에 시공관리국의 깃발이 올라갔다. 경감 일행은 미 대사관 내의 헬기 착륙장에 도착하자마자 옛 미국 문화원 쪽으로 향했다. 임시 총지국 곳곳은 사람들로 북적댔다.
 늦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견디지 못해 푸른 재킷을 벗은 관리국원들, 그리고 전투복 소매를 걷어 올린 제국 헌병들이 서류 상자들을 쉴 새 없이 안으로 들여왔다. 양복을 입은 상급자들은 거의 악을 쓰면서 지시를 내리는 중이다. 몇몇 헌병들은 로비 구석에 널브러져 땀을 연신 닦으며 그리스어로 무어라 투덜거렸다. 건물 곳곳에 상자들이 가득히 쌓여있었다. 온 사방에서 뿌연 먼지가 휘날렸다.
경감 일행은 사람들과 상자들과 최대한 덜 부딪히려고 조심하면서 나아갔다. 부딪혀도 토요사키의 중령 계급장과 경감의 절뚝거리는 다리가 상대방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그래도 계급장 앞세워 남을 무시하는 건 토요사키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황 중령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연신 삿대질을 하며 이것저것 지시하고 있었다. 토요사키와 쿠와하라가 손을 흔들자, 황 중령이 반색하며 웃었다.

 “우와, 이게 얼마 만이야! 우리 후배들! 어서 와!”

 토요사키와 쿠와하라를 향해 황 중령이 달려들어 포옹했다.

 “언니, 괜찮은 거에요? 밖에서 일하다가 무리하면 어쩌시려고요? 몸조심 하셔야지.”

 황 중령이 가슴을 주먹으로 탕탕 쳤다.

 “야, 이 언니 멀쩡해. 멀쩡하다니까? 병원에서도 찰과상 빼면 멀쩡하니 집에서 쉬세요 그랬다고. 모리스만 재수 없게 똥통 뒤집어 쓴거지 뭐. 그 녀석, 파편이 박혀서 미라처럼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데, 병실에 같이 있으려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마음 편하게 먹고 결혼해줘!’라고 하더라니까?”

 “여전하시네요. 그래도 건강하니 다행이에요.” 쿠와하라가 키득거렸다.

 그들 뒤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셋이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경감이 지팡이에 몸을 기댄 채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황 중령은 실망한 표정이었다.

 “아, 그래. 당신도 있었지. 오랜만이네요. 듀이 경감.”

 “자네가 멀쩡해서 정말 다행이군. 게다가. 고인을 대신해서 총영사로 승진까지 하셨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그렇지?”

 “총영사는 무슨 얼어뒈질. 어차피 임시 총영사직이고, 뒷처리나 하는 바쁜 자리인데.”

 황 중령이 대꾸했다. 그녀와 경감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쿠와하라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자자. 이제 일해야죠, 일! 수사 자료들도 인수인계 받고, 신임 지국장 님과 헌병대장님도 만나 뵈어야죠.”

 “그, 그래! 우리 새 사무실도 빨리 봐야죠. 유우키 선배는 언제 오죠?”

 토요사키와 쿠와하라는 경감과 황 중령을 잡아 끌다시피 하며 계단으로 향했다. 둘의 눈에서는 아직도 불꽃이 튀고 있었다.



 #
 경감은 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는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한숨이 나왔다. 바닥은 희뿌연 먼지와 검은 발자국들로 뒤덮여 있었고, 천장에는 거미줄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전선이 축 늘어져 있었다. 구석에는 상자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책상과 의자는 하얀 비닐로 덮여 있다. 환기를 시키려 해도 창문은 너무 작았다. 위험을 막는다는 이유로 말이다. 이른바 ‘새 사무실’은 1층 로비보다 나을 게 없었다. 그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범인이 아니라 집먼지 진드기를 먼저 잡아야 할 판이라니. 토요사키와 쿠와하라도 서류를 보는 둥 마는 둥 멍하니 있었다. 그 순간, 황 중령이 문을 열고 헐레벌떡 사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경감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자네 노크도 모르나?”
 
 “지금 그게 문제가 아냐! 유우키 선배하고, 아, 그래, 헌병대장 떴다고!”

 경감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토요사키와 쿠와하라가 벌떡 고개를 들었다.
 
 “카나리스 헌병대장요? 헌병사령부에서 있다가 만나기로 했는데 여기로 왔어요?”

 “내가 어떻게 알아? 지금 유우키 선배하고 함께 막 도착했다니까, 일하는 척이라도 하라고. 그 영감에게 밉보이면 우리 다 엿 된다, 알지?”

 황 중령이 마구 손을 흔드는 것과 동시에 층계를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모두가 얼어붙었다. 잠시 후, 노크 소리가 들렸다. 토요사키가 꿀꺽 침을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아, 예. 들어오세요.”

 빨간 생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유우키 쿄코(結城杏子) 중장이 한 손에는 솜사탕을 들고, 다른 한 손은 노신사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덩치 큰 로마군 헌병들이 그 둘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토요사키와 쿠와하라는 벌떡 일어났고, 황 중령은 정자세를 취했다. 경감은 모른 체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 꼴을 본 헌병들이 펄쩍 뛰었지만, 카나리스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그들을 물렸다.

 “여, 잘들 지냈냐? 얘들이 진짜. 어이, 어이, 여보쇼들, 긴장 풀어. 이쪽은 디미트리스 카나리스 헌병대장님. 글쎄 공항까지 마중 나오셨지 뭐야. 이 솜사탕도 사 주시고. 아주 자상하신 분이시라 이거야.”

 유우키 중장이 씩 웃으며 솜사탕을 흔들었다. 그녀가 웃자 송곳니가 살짝 보였다. 카나리스가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는 입을 열었다. 로메카13) 억양이 살짝 섞였지만 꽤 유창한 영어였다.

 “아니오, 아니오. 내가 좋아서 한 일이에요. 매일 헌병사령부에만 처박혀서 서류나 뒤적대다가,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과 함께 바깥 공기를 쐴 수 있다니. 얼마든지 환영이지요.”

 노장군은 황 중령, 토요사키, 쿠와하라 등과 차례로 악수했다. 한때의 ‘콘스탄티노플 최고의 매력남’ 다운 미소를 지어주면서 말이다. 그리고 아직 앉아 있는 경감 쪽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헌병들이 순간 움찔했다. 경감은 모른 척 우호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헌병들에게 이런 프랑크 식 무례는 콘스탄티노플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고, 이미 몇몇은 경감의 의자를 걷어차고 싶어서 근질거린단 표정이었다.

 “안녕하시오?”

 “MMPD (Midchilda Metropolitan Police Department) 제1특수수사국장 해리 앨런 듀이 경감입니다. 죄송합니다. 보시다시피 제가 절름발이거든요.”

 경감이 왼손으로는 장군의 손을, 오른손으로는 지팡이를 잡으며 힘겨운 척 몸을 일으켰다. 장군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오, 아니오. 몸이 불편하신데 굳이 일어나실 것 없소. 이거 큰 실례를 할 뻔 했구료. 어서 앉으시오. 편하게 있어요. 어서 어서.”

 유우키 중장과 이야기꽃을 피우려던 황 중령, 토요사키, 쿠와하라 등의 따가운 눈초리가 경감의 등에 박혔다. 경감이 뒤를 돌아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헌병들은 여전히 못마땅한 눈치였다. 카나리스는 아는지 모르는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름다운 여성들과 유능한 수사관과 조금 더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헌병사령부를 계속 비워둘 수도 없군요. 일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고 나왔으니, 일을 해야지요. 그럼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장군이 손짓하자 헌병 하나가 서류철을 내밀었다. 카나리스는 양복 상의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쓰고는 서류철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기계적으로 변했다.
 
 “내가 여기 온 것은 지금까지의 합의 사항을 확인하기 위함이오. 시공관리국, 미드칠더 정부, 그리고 로마 제국 의회(Βουλή των Ῥωμαίων)가 맺은 협정에 의해, 이번 사건의 수사는 우리 로마군 헌병사령부와 미드칠더 특수수사국의 합의 하에 설치된 합동수사본부에서 지휘하게 되오. 하지만 우리 쪽을 노린 테러가 아니니, 실질적인 수사권은 여러분에게 있소. 하지만 미국과의 공조가 필요하다는 게 우리의 요구 조건이오. 합동수사본부는 임시 총지국과 함께 갈라타 미 대사관 내의 옛 미국 문화원에 위치할 것이고, 수사본부장은 여기 계신 유우키 쿄코 신임 총지국장께서 겸임하게 됩니다. 맞습니까?”

 “예, 맞아요.”

 유우키 중장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황 중령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상급자들이 죽거나 중상을 입는 바람에, 그녀가 합의문 작성까지 도맡아 했던 것이다.

 “제국과 관리국 양 측의 연락관은, 임시 총영사인 황……황링인 중령께서 맡아주실 겁니다. MMPD 제1특수수사국장 해리 듀이 경감은, 수사본부의 실무 책임자로서 실질적으로 수사를 지휘하게 될 거요. 집무관이자 연방 검사로서 토요사키 루이코 중령은 사건의 기소를 맡게 됩니다. 범인은 미드칠더 법에 의해 기소될 것이고, 신병과 형량은 여러분의 재량에 맡기겠습니다. 특수수사국 부국장인 쿠와하라 사야코 경사는 경감을 보조하며 수사를 돕는 거고. 알겠습니까?”

 모두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카나리스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수사 비용은 제국에서 전액 부담할 것이오. 로마 제국의 영토에서 손님이라 할 수 있는 외교관을 대상으로 이런 참사가 벌어진 것은 우리의 치욕이오. 여러분들의 숙식 비용에 대해서도 그렇고. 총지국 건물이 파괴되며 관사 또한 심각하게 파손되었으니, 제국 정부의 예산으로 이 근처의 호텔을 임대했소. 당분간 총지국 및 수사본부의 임시 관사로 쓰일 것이오.”

 합의사항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었지만, 그녀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유리한 조건이라 생각하겠지. 경감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신이라는 재판관 앞에, 세계라는 법정이 있다면, 로마 제국은 스스로 그 법정의 증인이라고 생각했다.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한때는 콘스탄티노플에 주재하는 모든 대사관의 유지비를 제국이 부담한 적도 있었으니. 카나리스가 합의문을 마저 읽고는 서류철을 내려놓았다.

 “이제 합의 사항을 다 확인했소. 이의는 없으시겠지요?”
 
 그녀들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경감이 손을 번쩍 들었다. 장군의 표정이 굳었다. 정자세로 굳어 있던 헌병들이 꿈틀거렸다. 그녀들이 경감을 향해 손짓 발짓하며 입을 뻥끗거렸다. 무슨 짓이에요? 이 고문관이! 너 미쳤냐!? 기껏 합의문 잘 만들어 놨더니 무슨 개수작이야! 기타 등등.
 
 “그래, 무슨 일이신지?”
 
 “별 것 아닙니다만, 합동수사본부를 총지국과 함께 이 건물에 설치하신다고 하셨죠? 제 생각입니다만, 합동수사본부는 임시 관사와 같이 호텔에 설치하는 게 더 나을 것 같군요. 지금 이 사무실, 아니 건물이 이 모양이라 하는 말입니다.”
 
 카나리스 장군이 검지손가락을 뻗어 벽을 슥 훑어 보았다. 손가락 끝이 먼지로 새하얘졌다. 거미줄까지 달라붙어 있었다. 바닥을 내려다보니 역시 잿빛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카나리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맞는 말이오. 이런 곳에서 수사고 뭐고 제대로 될 리가 없지. 임시 총지국 겸 수사본부를 이 곳으로 결정한 건 미국과의 공조를 위해서였소. 공조만 잘 된다면 수사본부가 어디든 무슨 상관이겠소? 내 사과하리다. 이럴 줄은 몰랐구려.”

 “괜찮습니다. 제 의견을 들어주신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경감이 가볍게 눈을 깜빡였다.
 
 “장군께서도 그러시겠지만, 저 역시 제 부하들의 복지를 책임 질 의무가 있으니까요.”
 
 그 말에 유우키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입을 틀어막았다. 카나리스는 허리를 숙여 모든 수사국 소속 여성들의 손등에 일일히 가볍게 입을 맞추고, 경감과도 다시 악수를 하고서 자리를 떴다. 헌병들의 군화 소리가 저 멀리 사라진 다음에야 그녀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저 노친네, 화는 안 난 것 같죠? 재협상이라도 하자고 그러면 어쩌나 했는데.”

 “애초에 누구하고는 다르게 나쁜 사람이 아니니까, 그럼, 그럼. 처음 보는 나한테도 솜사탕을 딱 내밀더라고. 내가 말하잖아. 먹을 거 사주는 사람은 다 착한 사람이라 이거야.”

 황 중령이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았다. 토요사키와 쿠와하라는 나란히 책상 위에 엎어졌다. 유우키 중장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경감을 쏘아보았다.

 “근데 당신, 맛이 간 건 여전하네. 나 참, 영원히 안 볼 줄 알았는데 하필하면 또 여기서 보네.”

 “고맙다는 뜻으로 알겠네. 여기서 일하고 싶지는 않잖나?”
 
 경감이 벽의 먼지를 훑어내더니 입으로 후 불었다. 먼지가 날리고 그녀들이 움찔하자, 경감은 눈을 찡끗했다.



 #
 제노바 호텔의 이름은, 한때 이탈리아 도시국가 제노바가 콘스탄티노플에서 통상 특권을 보장받아 조계까지 만들었던 역사적 사실에서 유래했다. 이제 콘스탄티노플에서 제노바의 흔적은 씻은 듯 사라졌지만 말이다. 경감 일행이 호텔 로비로 들어서자마자, 지배인이 뛰쳐나와 그들을 포옹하며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놓더니, 객실 열쇠를 하나씩 안겨주었다. 전형적인 지중해식 환대로군. 경감이 읊조렸다. 그래도, 꽤 오래된 호텔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꽤 좋은 편이었다. 대리석 바닥은 깨끗했고, 고가구들에는 먼지 하나 없었다. 커튼도 색이 바랜 것이 없었다. 화분도 파릇파릇했다. 수정으로 만들 샹들리에는 부드럽게 빛을 발했다. 운전사와 벨보이들이 여행 짐과 서류 상자들을 운반해갔다. 쿠와하라 경사는 손짓 발짓까지 해가며 이것저것 지시하기 시작했다.

 “그 서류 상자들은 로비 저 쪽에다가 놔 주세요. 예. 소파와 탁자들 있는 곳 맞아요. 거길 사무실로 쓸려고요. 이 상자는 조심스럽게 다뤄주세요. 프로젝터가 들어있거든요. 그리고 보드판이랑 마커펜 좀 구해주실래요? 아, 컴퓨터 쓸 수 있는 거죠?”

 경감과 다른 일행들은 그녀를 뒤로 하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들 모두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던 것이다. 순간 경감이 멈추더니, 손가락을 튀겨 딱 소리를 냈다.

 “무슨 일인데요, 또?”

 황 중령이 대꾸했다.

 “당연히 일이지. 우린 진드기들에게서 도망친 거지, 일에서 도망친 건 아니라고. 쿠와하라. 수사 자료들 읽어 봤나?”

 쿠와하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경감이 손뼉을 쳤다.

 “좋아. 숙녀 여러분. 그럼 두 시간을 주지. 샤워도 하고, 옷도 좀 갈아입고, 목도 축여. 여기 식당에 샌드위치라도 만들어 달라고 해. 아니면 룸서비스로 갖다 달라고 하던지. 쿠와하라 자네는 브리핑 준비하고.”

 “브리핑이오? 보스,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지 반 나절도 안 됐다고요.”
 
 쿠와하라가 투덜거렸다. 평소에는 넉살 좋은 편이지만, 지쳐 있는 지금은 넉살을 부릴 형편이 도저히 아니었다. 경감은 무심하게 약병을 꺼내더니 비코딘 한 알을 삼켰다.
 
 “나도 알아. 다들 힘드니까 잔말 말고 해. 죽은 총지국장에 대한 신상 정보는 다 정리되어 있을 것이고, 일단 용의자 리스트라도 뽑아야 수사를 하던가 말던가 할 거 아냐. 원한 가질 놈들만 찾아서 추려 봐.”
 
 “이봐, 너무 막내만 시키는 거 아냐?” 유우키가 인상을 썼다.
 
 “그럼 당신이 도와주던지. 나는 쉬어야 하니 이만.”
 
 경감은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쿠와하라는 한숨을 쉬고는 지배인 쪽으로 달려갔다. 유우키는 근처 소파에 주저 앉았다. 황 중령이 토요사키에게 속삭였다.
 
 “저 개XX가 시공관리국 최고의 수사관이라니, 세상 말세다 참..”



 #
 경감, 토요사키 중령, 황 중령, 유우키 중장이 각자 자리에 앉았다. 아직 짐 정리가 안 된 탓에 브리핑 룸은 어지러웠다. 화분과 온갖 장식품, 고가구들은 한쪽으로 밀려났고, 구석에는 풀지 못한 짐들이 쌓여 있었다. 사무용품들도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 하지만 쿠와하라 사야코 경사는 철저하게 브리핑을 준비했다. 하얀 보드판과 유성펜, 그리고 슬라이드가 있었다. 전등을 다 끄고 커튼을 치니, 브리핑 룸은 밤처럼 어두워졌다. 서류철을 각각 한 부씩 받은 것을 확인하고, 첫번째 슬라이드를 그녀가 띄웠다. 화면에 먼저 뜬 것은 전직 총지국장의 투실투실한 얼굴이었다.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유르첸코(Николай Сергеевич Юрченко). 나이 64세. 벨리키 노브고로드 출신. 모스크바 국립대에서 수력학을 전공했고, 옐친 아래에서 민영화 과정을 지휘했어요. 뒷돈을 받고 과두재벌과 외국 회사들에게 국영 기업들을 팔아 넘겼죠. 물론 본인은 백만장자가 되었지요.”

 토요사키가 물었다.

 “그런데 민영화를 총지휘하던 놈이 어떻게 유고슬라비아 대사까지 밀려난 거야? 난 그게 가장 궁금한데.”

 쿠와하라가 두번째 슬라이드를 띄웠다. 러시아 신문기사였다.

 “1993년에 러시아 검찰이 국영 보드카 회사 민영화 과정에서의 뇌물 수수 의혹으로 수사에 들어갔거든요.”

 “경쟁자가 찔렀겠지?”

 쿠와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래서 옐친이 급하게 빼돌린다고 유고슬라비아 대사 자리로 간 거에요.”

 안경까지 끼고 서류를 뒤적거리던 유우키가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물었다.

 “잠깐, 술장사 민영화 하나 가지고 유고 대사로 빼돌렸다고? 소련 무너질 때 그것보다도 더한 짓거리가 한두 번 벌어진 것도 아니잖아. 대체 뭘 얼마에 팔아먹었는데 그래?”

 슬라이드 화면에 유명 보드카 상표 두 개가 떴다. 스톨리치나야(Столичная)와 모스코브스카야(Московская).

 “이 둘을 합쳐서 127만 달러에 팔았다던데요. 스톨리치나야 하나만 어림잡아도 4억짜리 상표인데.”

 유우키 중장이 초초한 듯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칼을 자꾸 만지작거렸다.

 “세상에, 스톨리치나야하고 모스코브스카야14)를 고작 127만 달러에? 열 받을 만도 하네. 그래서 유고 대사가 됐고?”

 “보스니아 전쟁이 터진 거죠.”

 쿠와하라가 슬라이드를 돌렸다. 총지국장과 총영사가 베오그라드의 다뉴브 강을 배경으로 같이 찍은 사진이었다.

 “운도 없네. 그래서?”

 “뭐 대사 노릇은 나름 잘 했다고 해요. 그런데 문제는 마케도니아 사태 이후, 밀로셰비치가 실각할 때 터졌어요.”

 “헤에? 뭔데?”

 코에서 미끄러져 내리던 보안경을 다시 고쳐 쓰며 준장이 물었다.

 “밀로셰비치는 국제사법재판소를 피해 러시아로 도망가려고 했어요. 그래서 유르첸코한테 돈을 잔뜩 찔러줬다고 그래요. 나오는 말에 의하면 최소 100만 달러.”

 여태까지 문서에만 시선을 집중하고 있던 경감이 갑자기 물었다.

 “그런데 밀로셰비치는 잡혔잖아?”

 그 말에 쿠와하라가 씨익 웃더니 슬라이드를 돌렸다. 이번에는 영어로 된 신문 기사였다.

 “최근에야 알려진 건데, 이 돈벌레가 밀로셰비치를 가지고 경매를 붙였어요. 이제트고비치(당시보스니아 대통령), 알바니아, 투즈만(당시 크로아티아 대통령), 그리고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 정적들까지 다 달려들었다고 그러던데요.”

 “이긴 건 누구지, 그래, 이제트고비치였나?”

”예. 여섯 배를 냈다던가요. 다른 놈들한테 받은 것까지 치면 거진 1500만 달러 이상을 챙겼다는 이야기까지 있어요.”

 유우키 중장이 얼빠진 표정으로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경감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중얼댔다.

 “멋진데. 그 동네 맛이 간 건 예전부터 유명하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

 간신히 충격에서 벗어난 토요사키가 물었다.

 “그러면 세르비아 짓인가?”

 쿠와하라가 마커펜으로 보드판에 세르비아와 러시아 마피아라고 썼다.

 “러시아 마피아 짓일 가능성도 배제는 못하죠. 총지국장이 보드카 기업 민영화 과정에서 마피아들에게 돈을 있는 대로 처먹었는데, 보드카 상표들을 가져간 건 SPI였고. 콘스탄티노플에는 러시아 이민자들 천지고요.”

 황 중령이 끼어들었다.

 “혹시 리비아 쪽 아냐? 너무 피해자 본인에게만 주목하는 것 같은데, 여하간 유르첸코는 관리국 고위 관료야. 동로마 제국은 나토군의 선봉에서 카다피를 조졌고, 시공관리국과 러시아는 카다피를 걸레짝처럼 팽개쳤잖아.”

 이번에는 쿠와하라가 리비아라고 썼다.

 “아 나 이런.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이 새끼 온 동네가 적이었단 소리잖아?!”

 중장이 서류를 집어 던졌다. 쿠와하라 경사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더니 슬라이드를 돌렸다. 이번에는 러시아어 신문기사였다.

 “그게 끝이면 다게요. 이 작자가 작년에 <이즈베스티야> 지하고 인터뷰 한 건데, 체첸 전쟁 때 반군에게 불량 RPG-7을 뿌리자는 아이디어를 낸 게 바로 본인이라고 그러던데요. 그것 때문에 RPG가 발사는 안 되고 그냥 터지는 바람에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은 체첸 반군이 한둘이 아니었고요. 그리고 체첸 전쟁에서 시공관리국은 러시아 편을 들었죠.”

 침묵하던 경감이 일어나서 보드판에 체첸이라는 글씨를 썼다.

 “흥미롭군. 용의자는 넷이야. 세르비아, 러시아 마피아, 카다피 추종자, 체첸. 하지만 마피아는 아닐 거야. 단순한 원한 관계로 시공관리국 총지국 건물을 날려버리진 않았을 거야. 개인적으로는 체첸 쪽 같은데. 콘스탄티노플-코카서스 노선 비행기들의 탑승객 명단을 조회해 봐. 제국 방첩국에도 협조 요청하고.”



#
 “남편은 유능한 사람이었어요.”

 아아 예, 그러시겠죠.

 경감은 최대한 동정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려 했다. 하지만 미망인을 친절하게 대하기는 힘들었다. 눈물 콧물을 있는 대로 쏟아내는 건 물론, 눈을 붉히는 것조차 짜증났다. 못 생겨서는 아니었다. 나이가 들면서 여느 슬라브 여인네처럼 몸이 좀 불긴 했지만, 50대의 전직 미스 소비에트는 아직 예뻤다. 하지만 그녀는 보드카에 취해 있었고, 샤넬 향수에 절어 있었다. 원래는 신임 총지국장에게 인사 차 방문한 것이다. 이 미망인을 유우키 쿄코가 자신에게 떠넘겨 버렸다. 미스 소비에트의 증언은 제국 경시청에서 깨끗이 정리했는데도. 간신히 숨을 돌렸는지, 미망인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고는 입을 열었다.

 “무능한 다른 공산당원들과는 달랐어요. 남편은 자본주의가 승리할 거란 걸 알았죠. 본능으로 알 수 있었어요. 옐친도 그걸 잘 알았죠. 그리고 언제나 로디나-맛(Родина-мать, 어머니 러시아)을 사랑했고, 일에 충실한 남자였어요. 이렇게 갈 사람이 아니었다고요, 오 성모님……”

 호사스럽던 호텔 로비는 살풍경하게 변했다. 고가구와 화분, 그림, 장식품들이 구석으로 밀려나거나 창고로 들어갔다. 간소한 사무용 책상 및 의자들, 보드판과 칠판, 스크린과 프로젝터 등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경감이 앉아있는 곳은 예외였다. 방문자 대기실로 쓰기 위해 남겨둔 곳으로, 낮은 칸막이로 둘러싸인 것만 빼면 예전 그대로였다. 고풍스러운 안락의자와 탁자, 온갖 장식품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심지어 촛대도. 칸막이 너머 책상에서는 쿠와하라 형사가 엎드려 졸고 있었다. 탁자 건너편의 여인이 계속 훌쩍였다. 경감이 주머니를 뒤졌다.

 “휴지 조금 드릴까요?”

 “오오, 아니에요. 제 손수건이 있어요…… 하지만 짜르께선 참 인정이 많으신 분이에요.”

 “그러믄요. 정말 인정이 많으시고 말고요.”

 미망인이 손수건에 코를 팽하고 풀었다. 손수건에 콧물이 눌러 붙어 모짜렐라 치즈처럼 주욱 늘어났다. 그녀의 숨결에서 보드카와 샤넬 향수가 뒤섞여 풍겼다. 경감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이 도시에서 그이가 쉴 수 있게 짜르께서 허락해 주셨어요. 이 짜르그라드15)에요. 성지에서라면 콜랴(니콜라이의 애칭)도 안식을 취할 수 있을 거에요. 차라리 저도 데려가시지, 오 그리스도여……”

 “부군께서는 이제 성지의 품에 안겨 안식을 취하실 겁니다.”

 부군은 품에 안길 뼛조각 하나 안 남아서 빈 묘지지만 말이지. 경감이 이죽댔다. 그는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말을 애써 억눌러야 했다. 장난해? 여태 그 따위로 살아놓고는 이런 날 안 올 줄 알았어? 러시아 인민을 착취하고, 마피아에게 사기를 치고, 체첸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고, 밀로셰비치를 생선마냥 팔아 치운 주제에 살기를 바랬으면 그게 미친놈이지.
 갑자기 그녀가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경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높아졌다.

 “부인, 부군께서 편히 눈을 감으실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더 생각나는 부분이 있으면 저기 쿠와하라 형사에게 모두 말해주세요. 저 친구가 다 정리해서 살펴볼 겁니다.”

 맞은 편 책상에 있던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쿠와하라는 머리를 부여잡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아니 왜 저에요? 왜! No! 그녀가 필사적으로 뻥긋대며 팔을 내저었다. 경감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저기 옆 책상 붉은 머리 아가씨 보이죠? 저 아가씨가 쿠와하라 형사입니다. 유능한데다 다정하기까지 한 여형사죠. 다 털어 놓으세요. 부인의 정신 건강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감동했는지 미망인이 또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오오, 고마워요, 친절하신 밀리치야(러시아 경찰) 양반. 레닌그라드에는 당신 같은 친절한 경찰이 어디에도 없었답니다. 잘 생기시기까지 하고, 이런 경찰 분들만 있었어도!”

 미망인이 그 말과 함께 경감을 부둥켜 안았다. 에탄올과 온갖 화장품 냄새가 뒤섞여 코를 후려쳤다. 경감은 콧물과 눈물과 침이 양복 상의에 묻어나지 않게 허리를 뒤로 확 꺾어야 했다. 빨리 좀 가, 이 망할 아줌마야! 그가 속으로 절규했다. 미망인이 쿠와하라에게 다가가자, 경감은 그제서야 쿠와하라에게 가까스로 웃어보일 수 있었다. 그녀는 힘없이 주저앉곤 맥없이 볼펜과 녹음기를 집어 들었다. 그 광경을 뒤로 하고 경감은 방문자 대기실에서 나왔다.

 “황 중령! 토요사키 집무관!”

 그녀들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토요사키는 엎드려 졸기라도 했는지 머리칼이 얼굴에 몇 가닥 붙어 있었다.

 “또 무슨 일인데요?”

 “내 눈으로 직접 사건 현장을 봐야겠어. 총지국으로. 따라와.”

 경감이 지팡이를 짚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황 중령과 토요사키가 주춤주춤 그 뒤를 따랐다. 쿠와하라 사야코 경사는 그들의 뒷모습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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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가 졌다. 석양이 스러지면서 호텔 곳곳에 불이 켜졌다. 호텔 식당은 꽤 작고 아늑했다. 벽에는 콘스탄티노플의 풍경화, 호텔의 옛날 사진, 호텔을 거쳐간 명사들의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식탁에는 하얀 식탁보가 깔려 있었고, 깨끗한 니케아 도기16) 접시들이 놓였다. 니케아 청화백자 꽃병에는 싱싱한 튤립이 꽂혀 있었다. 유우키 중장이 콧방귀를 뀌었다. 이게 웬 낭비야. 꽃병은 치워 달라고 해야겠네. 유우키 중장과 쿠와하라 경사가 제일 먼저 식탁에 앉았고, 뒤이어 황 중령과 토요사키, 그리고 경감이 식당에 들어왔다.

 “그래도 그렇지, 제 앞에 아줌마가 앉자마자 도망가는 건 뭐에요? 그리고 루이코 너, 동기를 이렇게 버리고 가도 돼?.”

 쿠와하라가 찌릿 노려보았다. 황 중령과 토요사키가 약속이라도 한 듯 양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경감이 되물었다.

 “내가 언제? 난 수사를 하러 갔을 뿐이야.”

 그는 대체 뭔 말을 하는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비코딘요, 아니면 콘스탄티노플 관광요?”

 뾰루퉁해진 쿠와하라가 쏘아붙였다. 토요사키가 품 속에서 흰 종이봉투를 꺼내 건넸다.

 “이것 좀 살펴 줄래? 사건 현장에서 작은 금고를 발견했거든. 그 안에서 나온 거야.”

 쿠와하라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중요한 증거품이다. 주머니에서 고무장갑을 꺼내 양손에 끼고, 조심스럽게 봉투에 손을 넣어 안에 있는 것을 꺼냈다. 불에 살짝 그슬리긴 했지만 멀쩡한 사진들이었다. 찍혀 있는 황자들의 얼굴에는 한 점의 티도 없을 정도로. 요안니스 황태자의 아들들, 그러니까 콘스탄디노스 황제의 손자들인 안드로니코스, 테오도로스, 미하일 황자들의 사진이다. 젊고, 아름답고, 훤칠하다. 쿠와하라가 입을 헤 벌렸다. 토요사키가 씩 웃었다.

 “원래 주인을 찾아 주려고 했는데, 경감이 증거품이라면서 너한테 맡겨야 한다고 우기지 뭐야.”

 “야, 그거 나한테도 없는 레어품이다. 너한테 주니까 고맙게 생각하라고.”

 토요사키와 황 중령이 합창하듯 말했다. 쿠와하라는 잽싸게 사진을 품 속에 집어 넣으며 이죽댔다.

 “아, 그 노파한테 먹이로 던져준 보상금이다 이거야?”

 그 말에 황 중령이 기묘한 기침소리를 내며 뒷목을 긁었다. 무표정하게 지켜보던 경감이 서류뭉치를 집어 들었다. 그가 서류뭉치를 무게 재듯 위아래로 흔들며 물었다.

 “그나저나 이건 대체 뭐야? 그 아줌마 무슨 소설 쓰나? 지난번에 했던 증언보다 늘었잖아?”

 “아이고, 그거 축약본이에요. 뻥을 얼마나 튀겨대던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웨이터들이 나타나 식탁 위에 식사를 차리기 시작했다. 음식들이 담긴 접시에서 김이 피어 올랐다. 다양한 냄새, 특히 향료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구운 밀가루 냄새를 풍기는 얇은 피타 빵과 동그란 쿨루리(참깨빵)가 있다. 케밥과 비슷한 기로스는 고기와 야채 외에도 감자튀김도 들어간다는 점이 특이하다. 미트볼, 포도잎으로 다진 고기와 야채, 쌀밥을 싸서 찐 도르마데스, 양고기에 토마토, 온갖 채소를 넣어 끓인 스튜, 숯불 냄새를 풍기는 수블라키와, 올리브유로 범벅이 된 꽁치구이, 레몬즙과 올리브유를 살짝 뿌린 오징어 튀김, 신선한 치즈와 야채가 들어간 페타 치즈 샐러드, 열기를 뿜어내는 뚝배기 요리, 새우 필라프, 그리고 음식을 찍어먹을 자지키(요구르트 소스)가 한 가운데 놓였다. 그리고 우조 한 병과 얼음이 든 그릇이 놓였다. 경감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평소보다도 더 젠체하는 목소리였다.

 “여러분들에게 도시의 요리17)의 진면목을 소개하도록 하지. 주방장이 꽤 협조적이더군. 이해력도 좋고, 요리 실력도 훌륭해. 이야기 하면서 천천히 먹어보라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이 미트볼 괜찮은데? 나중에 한번 만들어봐야지. 듀이, 이거 그리스어로는 뭐라고 하지?”

 “케프테데스라고 하지. 요리사가 육계피와 박하를 아주 살짝 넣어 맛을 냈다더군. 거기, 동작그만. 황 중령, 우조는 물이나 얼음과 섞어 마시는 거야. 96 프루프 짜리를 쌩으로 들이키려고? 무슨 러시아 사람이야 자네?”
 
 “짱깨인뎁쇼.”

 황 중령이 되쏘고는 씁쓸한 표정으로 우조 병을 들어 도로 내려놓았다. 경감이 집게로 얼음을 집어 들어 우조가 가득 든 술잔에 빠트렸다. 곧 얼음이 녹기 시작하자, 술 속에 하얀 기운이 퍼져나갔다.
 
  “봤나? 얼음이 녹아 물이 생기면서, 물과 섞인 술이 하얗게 변하지. 이 때문에 사자의 젖이라고도 하지. 마셔, 이때 마셔야 제 맛이라고.”
 
 황 중령이 우조에 아주 살짝 혀끝을 갖다 댔다. 순간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독한 알코올 냄새에 약국과 수제 비누 가게를 섞은 듯한 이상한 향기가 풍겼다. 황 중령은 오만상을 쓰며 잔을 내려놓았다. 희게 변한 우조는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컵에 물을 따라 허겁지겁 들이켰다.
 
 “미안한데, 듀이. 이 술은 나한테는 안 맞는 것 같아요.”
 
 “그것 참 유감이구만. 나는 좋아하거든.”
 
 경감이 술잔에 얼음을 빠트리고 우조를 따랐다. 우조가 하얗게 변하자, 잔을 집어 들고 홀짝거렸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내더니, 비코딘 한 알을 꺼내어 우조와 함께 삼켰다. 맛있다는 듯 음미하는 표정이었다. 황 중령이 경감을 노려보았다. 경감은 아랑곳 않고 포크를 집어 음식을 덜었다. 다들 우조에는 손도 대지 않았지만, 환성과 탄성이 식탁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경감, 이건 뭐죠? 맛이랑 생김새는 라자냐 같기도 한데 특이하네. 맛있어요.”

 토요사키가 포크로 음식을 담으며 물었다. 경감이 피식 웃고는 답했다.

 “그건 무사카라는 거야. 으깬 감자, 가지, 다진 고기를 층별로 쌓아 베샤멜 소스를 끼얹어 오븐에 구운 거지. 맞아, 라자냐 같은 거야. 밀가루는 없지만. 그건 그렇고, 레치나는 안 나오나? 그게 송진 향이 나게 발효한 백포도주인데, 아주 근사하거든. 물론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 곰팡내가 난다나?”

 그녀들이 모두 경감을 쏘아 보았다. 유우키 중장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경감, 당신 말이야. 양키 경찰 주제에 동로마 요리에 대해서 잘 아네. 당신 그리스계나 음식 평론가 지망생 뭐 이런 거라도 돼?”
 
 “어렸을 적 이웃들 중에 동로마 이민자들이 많았거든. 배고프면 동네 이민자들 식당에 가서 이것저것 얻어 먹고는 했지.”

 “잠깐, 설마 그래서 여기 온 거 아니지? 그리스계도 아니고 그리스 이민자들하고 친하다고? 나는 정교회 신부의 딸이라고 여기 보내던데. 선별된 지역 전문가는 무슨. 여하간 본국 놈들 일 처리는 꼭 이런 식이라니까.”

 유우키 중장이 음식을 입에 가득 담고 투덜거렸다. 경감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우조 잔을 두 번째로 비웠다. 그런데 경감이 식탁에 머리를 쿵 하고 박더니 의자에서 미끄러졌다. 모두의 시선이 경감을 향해 꽂혔다. 그의 몸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분위기가 순간 싸늘해졌다. 쿠와하라가 경감의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보스, 보스? 제 말 들려요? 정신 차려요!”

 “이런 젠장. 어이! 지배인! 요리사! 아무나 좀 이리 와 봐! 사람이 쓰러졌어!”
 
 유우키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정색한 얼굴의 지배인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주방에서는 요리사가 손에 비누거품을 묻힌 채로 튀어 나왔다. 직원들도 하나 둘 식탁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쓰러진 경감을 보고 지배인이 시퍼렇게 질렸다. 그가 더듬대며 물었다.

 “하느님 맙소사. 대체 이게 무슨-”
 
 “듀이 경감이 쓰러졌어요. 이게 대체 뭔 일이람- 거기 요리사 아저씨,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구급차 불러요!”
 
 요리사가 고개를 끄덕하곤 프론트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토요사키가 조심스럽게 우조 병을 집어 들었다. 순간 토요사키가 신음했다.
 
 “여기에 독이 들어간 거야. 이 우조 때문이라고. 우리도 다 음식을 먹었지만 멀쩡하잖아. 경감 혼자만 우조를 마셨고.”
 
 지배인이 항변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이건 아테네 올림픽 기념으로 만들어진 귀한 우조에요. VIP에게만 내던 거라 이겁니다. 9년 동안 창고 안에 박혀 있던 술인데, 이걸 대체 누가……”
 
 “우리를, 혹은 우리 수사를 못마땅해하는 누군가가 저질렀겠지. 일단 밖에 있는 헌병들에게 최대한 조용히 구급차를 불러달라고 하고, 그리고 디미트리스 카나리스 장군께 연락을 취해서-”
 
 토요사키가 얼이 빠져 있는 지배인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고 있을 때, 경감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모두가 펄쩍 뛰었다.
 
 “경감! 당신 괜찮아?”
 
 “왜들 그러고 있나……? 괜찮아, 괜찮아, 나는 괜찮아……” 경감이 몸을 일으키려다 주저앉았다.
 
 “이 인간이 여기가 무슨 궁정동 안가라도 되는 줄 아나. 무리하지 말고, 곧 구급차가 도착할테니 누워 있어요!”
 
 “구급차?”
 
 경감이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웃음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뒤로 나자빠지면서도 계속 웃었다. 눈가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크게 웃었다. 사람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황 중령이 나지막하게 쌍소리를 내뱉었다.
 
 “이거, 이거 신경독 아냐? 나도 조금 마셨는데 병원에 가야 하나?”
 
 “이런 멍청이, 내가 독이라도 먹은 줄 알았나?”
 
 경감이 비틀대며 벽에 기대 앉았다. 그가 주머니 속을 더듬거리더니, 비코딘 약병을 꺼내 들었다.
 
 “아세트아미노펜. 하이드로코돈- 딸꾹, 알코올, 그리고 아니스. 아네톨. 상호 작용. 우조와 비코딘을 같이 먹으면 아주 좋지. 아프지도 않고, 기분도 좋아지고, 우조에서 피어나는 하얀 구름처럼 둥둥 떠다니는 기분? 하-하. 걱정 마. 전에도 해봤는데 별 탈 없어.” 18)
 
 모두가 입을 쩍 벌렸다. 유우키는 속으로 절규했다. 이런 미친 약쟁이 새끼. 듀이가 실실대며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흑백 사진이 뚱하게 내려다 보았다.
 
 “벽의 황금 모자이크처럼… (딸꾹) 성스러운 불길 속에 서 있는 성자들이여… (딸꾹) 내 영혼의 노래 스승이 되어주오 (피식) 나를 거두어 영원한 예술품으로 만들어 주시오… (딸꾹) 비잔티움의 귀족과 귀부인들에게 노래해주련다…. 지나간 것과 지나갈 것들, 그리고 다가오는 것….” 19)
 
 멍하니 있던 지배인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총지국장님, 병원에 데려가야 하지 않을까요? 이거, 어쨌건 약물 과용 아닙니까?”
 
 유우키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가 최대한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됐어. 직원들 불러서, 아무 데나 갖다 버려. 객실이건 화장실이건 쓰레기장이건 안 보이는 곳으로. 아 어서 끌고 나가라니까? 빨리!”

 경감이 질질 끌려나갔다. 모두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호텔 직원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나갔다. 유우키가 크리스탈 잔에 레치나를 콸콸 들이부었다. 우리를 우습게 보겠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우조라면 꼴도 보기 싫었다.
 그나마 경감의 협박과는 달리, 레치나는 꽤 먹을 만했다. 서늘한 와인에서 풍기는 소나무 향기는 상쾌했다, 두통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때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최소한 그 때 까지는.





1) Γαλατά. 이스탄불의 금각만 북부 해안지역. 유태인 공동체 및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조계로 유명했던 지역. 현 이스탄불의 베이올루 구.
2) 터키에선 이스켄데르 케밥이라고 한다. 그리스어 ‘기로스(γύρος)’는 ‘돌리다’는 뜻으로, 영어 ‘자이로스코프(Gyroscope)’ 등에 들어가는 ‘자이로’의 어원이다.
3) βασιλεοπάτωρ. “황제의 아버지”. 이 단어의 터키어 카운터파트는 바로 아타튀르크(Atatürk, 터키의 아버지)(…)
4) Midchilda Agency for Commercial & Industrial Affairs.
5) Άγιος Δημήτριος, 이스탄불의 세라글리오 곶(Seraglio Point), 토프카프 궁전이 위치해 있다.
6) Καλλίπολις. 현 터키 겔리볼루, 영어로는 갈리폴리.
7) 이스메트 이뇌뉘(Ismet İnönü), 티마이오스는 그리스어 이름으로 명예를 뜻하는데, 터키어로 명예를 뜻하는 이름이 이스메트이다. 이뇌뉘는 터키 에스키셰히르(Eskişehir), 그리스어로는 도릴레오(Δορύλαιο) 근처의 지명이다.
8) Ελλήσποντος, 혹은 헬레스폰투스(Hellespontus) 해협, 현 터키 다르다넬스 해협(Dardanelles)
9) Εκλεκτός Κεμάλης, 터키의 국부 그분 (….)
10) 현재의 터키 트라브존.
11) 라틴어 Excubitores, 즉 “척후병”이 어원. 로마 제국의 근위연대 중 하나.
12) 햄버거 힐 전투(Battle of Hamburger Hill). 1969년 5월 10~20일 사이에 벌어진 미군/남베트남군 대 북베트남군 사이의 교전. 여기서는 미군과 남베트남군 외에도 로마 제국 공수부대도 참전했다. 반공의 시대 아니던가(…)
13) Ρωμαίικα, 로마어, 이 세계관에서 표준 구어체 그리스어를 뜻하는 말들 중 하나.
14) 이 둘은 러시아 보드카 브랜드 중에서도 톱을 달리는 역사와 전통의 브랜드다. 실제 역사상에서도 2002년 이 두 브랜드의 주인인 SPI 그룹은 브랜드 헐값 인수 관련으로 러시아 정부랑 싸우다가 상표에 대한 권리를 압수당했다. (…)
15) Царьград, 황제의 도시. 러시아에서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을 부르던 말.
16) 실제 역사에서의 이즈니크 도기(İznik pottery)
17) Πολητική κουζίνα 폴리티키 쿠지나, 그리스어로 터키 요리를 말함. ‘도시’는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을 뜻한다.
18) 실제로 비코딘을 술과 같이 복용하면, 심각한 간 손상을 유발할 수 있다. 또한, 우조의 주 재료인 아니스에 함유된 아네톨 성분과 알코올이 상호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에 과음은 좋지 않다. 우조를 괜히 물에 타서 마시는 게 아니다.
19) 처음 인용했던 시, 「비잔티움 항해」의 다른 구절들이다.

덧글

  • Blitzcat 2011/12/25 18:43 # 답글

    오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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